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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존재를 삼켜 허공을 뱉아라
      작성자:   방주   [admin@urbuddha.net]
 


Swallow all beings Eject emptiness



金剛經 妙解
 (금강경묘해, Hidden Words of Buddha's Diamond-Sutra)








묘봉 운륵(妙峯 雲勒) 송주(頌注)  

출판사: 비움과소통

출판일: 2013.07.31

페이지수: 768

ISBN:9788997188383

판형: A5, 148*210mm













책소개



"존재를 삼켜 허공을 뱉아라" 는 저자 묘봉 선사께서 금강경(金剛經) 본문에 대한 주석(註釋)을 달고 선(禪)의 안목으로 독자적인 견해를 게송 형식으로 드러낸 금강경 수행지침서이다. 

또한 구마라집(鳩摩羅什)과  보리유지(菩提流志)의 금강경 한역(漢譯) 원문을 최초로 올바르게 영문으로 번역하시고, 이를 다시 해설하신 漢ㆍ英ㆍ韓 금강경 해설서이기도 하다.









저자소개



저자 묘봉 운륵(妙峯 雲勒) 선사(禪師)는 본관은 평산(신)이요, 속명이 동욱으로 임오(壬午: 1942)생이다. 수덕사에서 만공 스님 제자인 덕산(悳山) 스님을 은사로 축발하여 해외 포교를 하다 귀국해서 1984년 덕숭총림 수덕사 초대 방장 혜암(惠菴) 스님으로부터 수법(受法)하였다. 계룡산 신원사, 남해 백련암, 서울 화계사 등에서 주석하며 외국스님과 신도들을 제접하여 호응을 받았으며, 현재 공주 갑사에 주석하며 수행정진 하고 있다. 저서에는 《철학의 파멸》, 《천수경 이뭣고》, 《눈 없는 돌사람이 글자 없는 책을 읽는다》, 《선문촬요》, 《육조 법보단경》, 《조사선에로의 길》, 《무엇이 그대의 본래 얼굴인가》, 《THE COOKIES OF ZEN》(EH BOOK) 등이 있다.







목차



緖文(서문)



제1. 法會因由分[무엇이 법회인가]

How the Dharma Begins



제2. 善現起請分[善現하여 여쭙다]

An Interrogation Disclosed From Empty Logos



제3. 大乘正宗[大乘의 핵심]

Be-all and End-all of Mahayana



제4. 妙行無住分[行은 오묘하여 住함이 없다]

Profound act abides no-where



제5. 如理實見分[如如히 理와 事에 맞추어 보다]

Seeing the arche, being in essence and for factum



제6. 正信稀有分[바른 믿음은 참으로 드물다]

The righteous faith is so rare to raise in the mind



제7. 無得無說分[증득함이 없어 설함도 없다]

No Thing To Be Attained, Nothing To Define.



제8. 依法出生分[법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Dharma becomes real by meritorious conduct



제9. 一相無相分[一相도 본래 相이 없다]

Not even one form has no form in its origin



제10. 莊嚴淨土分[정토의 장엄]

To build the absolutely pure land



제11. 無爲福勝分[수승한 無爲의 복덕]

The utmost virtue and merit is doing not a thing at all



제12. 尊重正敎分[바르고 존중스런 가르침]

Upright and faithful Teaching



제13. 如法受持分[여법하게 수지하라]

Uphold the Dharma rightful



제14. 離相寂滅分[상 여의니 적멸이라]

Leave nothing everywhere, void and calm Nirvana



제15. 持經功德分[말씀 지니는 공덕]

What should be uphold in the Words from the Buddhas?



제16. 能淨業障分[능히 업장을 조촐케 한다]

Liberation from all Karma chain



제17. 究竟無我分[究竟은 무아라]

At the end no I will not be



제18. 一體同觀分[한 몸 같은 줄 관하라]

The Whole should be seen as Same



제19. 法界通化分[법계에 두루 나투다]

Disclosure in whole mind



제20. 離色離相分[色과 相을 여의다]

Departed from each and every forms and ideas



제21. 非說所說分[說할 法이 있는 說이 아니라]

Neither Dharma nor Dharma-to-talk



제22. 無法可得分[證得할 법이 없다]

Not a Dharma can be attained



제23. 淨心行善分[마음 조촐한 것이 善이다]

Unaffected Mind is the Goodness.



제24. 福智無比分[복과 지혜에 견줄 것이 없다]

Virtuous goodness cannot be measured.



제25. 化無所化分[나투나 나툼이 없다]

From No Where, but Comes to Be



제26. 法身非相分[법신은 相이 없다]

Dharma has no body-form.



제27. 無斷無滅分[끊고 滅할 것도 없다]

Nothing to cut nor empty out.



제28. 不受不貪分[받지도 탐하지도 않다]

Take no thing want no thing



제29. 威儀寂靜分[위의가 그윽하고 고요하다]

Exertion is calm and serene



제30. 一合理相分[이치와 事相이 둘이 아니다]

Neither phenomenon nor noumenon



제31. 知見不生分[知見을 내지 않음]

Not Producing any knowledge



제32. 應化非眞分[應化는 참이 아니다]

Being revealed and actualized the non-existing body



脫尾(탈미)







 





緖文(서문)



비롯하는 말이

무엇을 왜 무엇이 어찌 설할지

설명이나마 가하련만 되레

제 변명 될까 도리어 걱정이다.

아는 체는 꼴이 우습고,

남 다른 깊이로 간파한 것이라면 그렇고,

무엇이 다르다 말하려니 끊긴다.

그래 끊긴 그곳에서 나름대로 출발하리라.

 

금강경이라 읽고 또 읽지만

아는 듯싶어 되돌아보면 감감하였다.

五家解(오가해)도 막상 뒤쳐 닥치면 천박해졌다.

하루는 예수교인을 자처하는 이 있어

금강경이 무엇이냐 물었다.

스스럼없이 대답한다는 것이 그만,

입 없고 귀 없는 경이라 하였다.

한 술 더 떠서 내친김에

금강경을 석가모니도 설하지 못하는 경이라 했다.

화장 끝내고 다시 분칠한 격이지만

佛說(불설)은 說이 覺(각)이기에 그랬다.

牟尼(모니)를 [본래 muni이지만 無尼(무늬)나 다른 글자 아니 쓰고

큰 암소의 울음으로 牳(무)나 哞(모)를 빌려 썼다.]

 

금강경은 "최초에도 없는 말이요; 각에 무슨 처음이!

지금도 없으며 미래에도 결코 없는," 끝은 더더욱!

들으니 diamond이지만 만질 수도 볼 수도,

어디에도 없는 "말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르니 빛나고, 가진 채 온몸 숨었다.

 

이 뭣꼬?

부처님이 설하신 바 없고 그 이전은 말보다 없고

말하는 부처를 듣는 중생이 어찌 알아들으랴?

시간의 흐름조차 멈추니 보도 듣도 못한 소리다.

그렇다면 금강의 말씀이 어디서 왔을까?

太初, 威音王(위음왕), From The King before ab ovo 이다.

나와 네가 세상에 오기 전이니

우리를 되돌아본 이전의 한 임금이시니

이 나라 모든 백성들은 善根이 한없이 깊어

敦篤(돈독)한 신심을 빠짐없이 내어 끝없는 공덕을 쌓는다,

 

그 국토에 계신 임금의 명호는 남녀노소가 없고

빈부나 신분의 고하가 전혀 없었으며

생로병사가 없고 고집멸도나 三法印도 없느니라.

불법의 이름이 없으므로 모두가 부처님이요

모두가 백성이지만 아무도 다툴 것이 없었으므로

임금의 이름도 無爲正光 無心法輪 無位大王이었다.

 

세 가지 無가 금강경의 宗旨로 되었다.

그리하여 자세히 묻고자, 알고자 하면 할수록

格外(격외)의 一句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공부 한 이야 알거니와 獨學하며 解讀을 즐기던 이

그만 경악하고 否定하여 이르되

허망한 일 뿐이니, 아무나 할 공부는 아니란다.

혹 또,

쉽지만 무진장 비밀들이 속에 들었다 하나.

이 모두 허망한 말질이니

모르거든 입 다물고 귀나 닦을 일이로다.

실상 어려운 것이 말보다 귀로 듣기다.

[그래서 희랍인들도 良久(양구)를 αποςιώπηςις 라 불렀다]

세간의 말조차 들을 줄 알기가 어려우니

오죽하면 觀世音(관세음)보살이 三世에 으뜸이랴!

 

"없다"는 말이 수없이 나오는데

말할 수 없기 때문이요, 말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無를 無化하지 않고는 모 배기는 놈이다.

첫째는 金剛이다.

둘째는 말씀이다.

셋째는 法門이다.

넷째는 凡聖이다.

다섯째 靈肉이다.

여섯째 言文이다.

 

순수는 곧 無垢(무구)이며 광채는 바로 無化이다.

말씀은 곧 無言이며 소리는 바로 無?(무애)이다.

법문은 곧 無得이며 이해는 바로 無體이다.

중생은 곧 無佛이며 부처는 바로 無心이다.

영혼은 곧 無念이며 육신은 바로 無私이다.

언어는 곧 無形이며 문자는 바로 無相이다.

 

無를 없다는 뜻으로 알면 이미 무가 아니고

無는 없는 것이므로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말할 수 없다 하여 無를 有無에 상관없다 못하며

없는 것은 없다고 부르는 것도 있을 수 없다.

 

無無無毋无橆無(무무무무무무무)

없는 것은 없다고 이를 수 없나니

없다고 하는 그 無도 없어야 없음이니라.

 

'모든 존재'라는 말을 쓰지만 이는 있을 수 없는 말이다.

존재도 一切者(일체자)인 '모든'도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개별적인 有로서의 나무 돌 하늘 어느 하나 활용과 달리

자신의 identity를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我相(아상)으로 본다. 즉 I-ness

'나'는 단순히 주체가 아니라 자기 확신이다.

내가 본 나는 자기분열이 아니기 때문에

왜냐하면 자기의식을 통하여 존재를 구성하므로

자기부정[self-negation] 속에서 얻는 확신이다.

Human-being은 이처럼 남 속에서 찾는 소위 자신이다.

 

소위 man의 正體(정체)를 지탱할 수 없는 행동,

따라서 자신의 동일성을 保持(보지)하지 못하는 無로서

곧, 否定과 부정된 것의 命題는 서로를 구분할 수 없다.

나는 나 아닌 인간으로부터만 설정이 가능하다.

 

나의 존재를 實證하는 것은 자가 부정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나는 곧바로 나 없는 우리로 행세하며

Being-in-general에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Common-being이라 불릴 수밖에 없게 된다.

 

否定과 부정된 것에서의 자기부정은 동질성을

회복하고 自己無化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필경 Superior Being 즉, 수자상을 설정한다.

그리고 이것은 존재의 윤회하는 모습이다.

 

나무가 아닐 때 소나무가 태어난다.

소나무로 명명 되자마자 소나무는 없다.

나무도 아닐 때 도리어 없는 것이 드러난다.

드러난 그곳에 소나무는 새살림 산다.

 

부처는 중생을 의지하여 이름을 얻는다.

부처를 부처로 보자 부처는 존재를 그만둔다.

중생이 본래 없으므로 부처 없음이 이와 같다.

본래 없는데 부처라 부르는 것은 빌림이다.

 

일체 존재는 존재한다면서 존재가 없으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한다.

존재는 名分을 잃고 얻되 얻은 것이 없으니

마음대로 有無라 불러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우리는 佛典과 佛經 혹은

佛說과 法說을 심리적 논리적 전개를 통하여

深娛(심오)함과 광대함을 어떻게 정립시키고

포괄적이고 綿密(면밀)함이 독립된 경안에서 가능한가?

밝힐 수 있어야 한다.

 

 

1

이것은 책이다. 반대로 묻고 있다. 이것이 책인가?

제기된 "이 무엇"을 위한 진정한 설명과 상식적 소통에서

본래 책이 수행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설명이 도리어 쑥스럽고 상식적 소통이 도리어

자신을 더욱 불확실케 하고 나아가 曲解(곡해)를 야기하기에.

 

부처님 말씀이다. 그러나 말씀은 책이 아니다.

상식적 斷言과 佛說의 非書籍性(비서적성)은 설명할 수는 있으나

거꾸로 주체를 밝힐 수는 없기 때문에

스스로 無知라 斷言하여야 하기에.

 

부처는 상식을 위하여 [상식 속에 불설이요, 불설 안에 말씀 없다.]

상식을 초월한 이 말씀을 자기 것이라 주장 할 수 없으므로

상식에 반하여 설하지 않는다. 수긍하면 더욱 어긋난다.

상식이 듣지 못하는 것은 佛說이 아니기에.

 



2

부처님 말씀이 경이라 부른다.

Words of Buddha are called Sutras;

No one knows what Buddha said.

How then can we mention Sutra as words from Buddha?

 

부처님은 머리나 입으로 이 책을 쓰지 않으시었다.

What we think Buddha said

Does not come from Buddha directly,

Then, gladly conclude that no word comes

From his mouth nor his brain either.

 

입도 마음도 아니로되 뜻이 깊어

부처님 말씀아 일컬어도 무방하리라.

What is negated must be realized with

An affirmative conclusion to adjust our negation.

 

무방하다는 말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특별한 도구가 없기 때문이리라.

Finally we art negotiating with both sides of ourselves;

Being-for-me. Writings are very selfish explanations

From others to the me in others.

 

 

3

책과 경에 대한 논란은 끝이 없다.

These dialectical logic is not derived from our

Reasonable truth so to speak; rather, we are always

Speaking logically to make sure it looks good on

Me in a common sense way. The more I know the more

I can say for others truthfully in the name of book.

 

종이에 쓰인 글을 책이라 부르지만 敍述(서술)과 意圖(의도)는

서술되어진 것과 이해를 동시에 충족시킬 언어는 없다.

종이에 쓴 것은 쓸 수밖에 없는 것과 쓸 수 없는 것 때문에

완전을 지향함은 결국 스스로 반증된 非 충족이다.

중생을 위하시는 말씀이 인간의 손과 입을 통해서

나온다는 것은 문체와 해석이 필연인 만큼 절대 공허이다.

말씀의 實證이 經이고 경의 顯現(현현)이 책이어야 하기에

부처님과 말씀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진가(眞假)도 아니다.

 



4

반면, 경이 말씀이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靈肉(영육)과 相號(상호)를 갖춘 如實(여실)한 객관적 실체로서

존재하여야 한다.

부처님이 객관적 존재라면 이는 인간의 주관적 견해이다.

주관적 존재가 객관적 타당성을 획득하려면 감관에 의지하여야 한다.

그 어는 감관적 존재도 그 자체에 있어서 감각적이지 않으므로

예상된 객관성을 빙자하여 삼자인 그 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To be-come a Buddha, some-thing with physical-mentral body

Has to be prsented as a real, truthful and righteous, But

This is unreal, untruthful and unrighteous reasoning with absurdity.

 



5

부처를 남이라 불 수 없듯이 나도 나라 부를 수 없다.

나일 실제가 없고 너일 대상 없는 것을 우리 없음을 빌미삼아

마음이라 불러 감각적-초감각적 相을 포용하려 한다.

부처를 마음이라 부르는 것은 실체 없는 감각에서 배운

자기 소외된 의식의 超絶(초절)적 回歸(회귀)이고

마음이 아니라 부르는 것은 감각적 존재가 이미 감각을 떠난

초감각적 형이상학적 idea일 뿐인 까닭이다.

How do we distinguish mind and body, or, any opposite elements?

What do we know about ourselves who is originally non-dual being?

Differences are coming from the sameness of two or more identity.

 



6

금강경과 모든 큰 수레로 움직이는 부처님 말씀은 해탈의 논리에

의하여 수행된다.

四 聖諸(성제, satya)는 一切皆苦(일체개고)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Marga[道, 혹은 能達]에서 쉬니 이것이 休歇(휴흘)이다.

四句偈(사구게)는 四相을 두드려 스스로 正等覺에 이르나 到達이 없으므로

格外를 통하여 不立 文子하여 如如한 至道에로 나아간다.

四 聖諸, 三 法印[법인, dharma-mudra]이 모두 이 까닭에

佛法의 修多羅(수다라) 기반이 되며 解脫(해탈)에로의 논리인 것이다.

 

All the mahayana Sutras runs to be liberated from themselves;

One thing which is unknown by itself can cause sufferings in general.

Suffering does not mean pain with mental-physical difficulties.

Man carries suffering just by himself.

That is, knowing is always unknown by

Truth-seekers[Mαςτερ] that which gives us the room for interrogation.

 



7

인간의 육체에 神의 정신을 불어넣거나 혹은 그 반대로

인간의 정신에 신의 육신을 불어넣음으로써 종교는 완성을 꾀한다.

완성에의 추구는 불완전을 미덕으로 삼고 인간화 하려는 신들의

타락을 부추긴다.

 

성스러운 진리와 진실한 聖은 스스로 혼돈되어 인간의 사사로운

욕망을 용서하고 자유를 표방하는 열쇠를 내어준다.

쉬고 또 쉬라 이르시니 육체는 형상을 내어주고 정신은 이념을 뱉어

다시는 서로에 의지하지 말게 하라.

태양은 서산에 떨어지고 달은 동산에 뜬다네.[無二無異]

 

Holy truth and truthful holiness ought to be confused by our

conceptualization; then, it allows deluded mind in front of human nature

Saying that it is our own nature, that it is free mind, and that it is inevitable afterward.

Aposiopesis in neither-nor for good.

Let me give you on word; sun falls down west, at the same time moon comes from east.

 





 


脫尾(탈미) Postlude



What is, then, the four lines verse?


What is it?

Who are you?

Tell me at once!

There four 1,2,3...


If you understood, it must be knuckle head.

If you dunno, even in the dream, you haven't seen the Buddha yet.


그렇다면 금강경의 四句偈(사구게)는 필경에 무엇인가?


이뭐꼬?

뉘신가?

일러라!

하나 둘 셋

이와 같아 넷이니라!


보았다면 바보이겠고

못 보았다면 여전히 劫(겁)밖의 일이라

꿈속에 조차 부처를 본 적이 없느니라.









 



작성일  (date : 2013-10-02 오후 5:19:51,   visit :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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